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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폭스바겐(VW)의 역사, 강력한 독일 경제의 상징

자동차 회사

by 자동차 역사가 2014. 8. 5.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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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폭스바겐(VW)의 역사, 강력한 독일 경제의 상

 1) 폭스바겐의 개요

- 창립 1937년

- 창립자 : 페르디난트 포르셰 (Ferdinand Porsche)

- 국가 : 독일

- 본사 : 니더작센 주 볼프스부르크

- 모기업 : 폭스바겐 AG

2) 폭스바겐 년도별 약사

 - 1933년 

   1차 세계 대전 이후, 히틀러가 국민차 프로젝트로 포르쉐 박사에게 1000 마르크 미만의 국민차(Volks + Wagen)를 만들 것을 명한다. 히틀러의 요구 조건은 성인 2명과 어린이 3명을 태우고 100km/h로 달릴 수 있는 자동차였다. 그 "국민 자동차"는 제3제국 국민들에게 990DM(그 당시 작은 모터사이클 가격에 해당함)에 제공될 예정이었다.(참고로 당시 평균 주급은 32DM).

 - 1937년 

  : 회사 설립

 - 1939년

   2차 세계 대전 발발로 국민차 프로젝트가 중단되고, 1938년 4월 20일 히틀러의 49세 생일에 한 대의 타입-1 카브리올레가 히틀러에게 기증된 것 외에 저축 프로그램을 마친 그 누구에게도 차는 지급되지 못했다.

 - 1940~1944

 포르쉐 박사는 폭스바겐사를 군용 목적으로 이용하라는 임무를 맡게 되어 ‘쿠벨바겐(Kubelwagen)’이라는 군인용 짚차가 탄생하게 된다.

변형된 모델로는, 수륙 양용인 ‘Schwimmwagen’이 있었는데 ‘쿠벨바겐’과 같은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군용차였다. 아직 미완성인 폭스바겐 공장에서 총 50,788대의 ‘쿠벨바겐’과 14,276대의 ‘Schwimmwagen’이 생산되었다. 2차대전이 끝날 무렵까지 비틀은 고작 630대만이 생산되었다.

 - 1946~

1946년에 10월 14일, 전쟁이 끝난 이후 10,000번째 국민차가 생산되었다. 세단 가격은 5000 라이히스마르크로 정해졌는데, 그래도 여전히 일반인들이 살 수는 없었다. 1947년에 공장 운영팀은 국민차를 수출하기 위해 하노버(Hannover) 수출 전시에 참가하기로 결정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는데 세계적으로 성공적인 자동차가 탄생하려는 순간이기도 했다. 폭스바겐의 첫번째 수입자이자 딜러는 네덜란드의 폰(Pon) 형제였는데 1947년에 폭스바겐과 계약을 체결했다. 폭스바겐 공장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였다. 공장의 생산량에 많은 부분이 CCG에 공급되었다. 1948년에 Heinrich Nordhoff는 폭스바겐 공장의 경영 감독 자리를 맡게 되었다. 그는 그의 의무와 선경지명, 그리고 열정으로 업무에 임했다. 그의 기본철학은 근로자들과 꾸준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또한 근로자들을 같은 목적을 위해 노력하는 파트너로 여겼다. 이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폭스바겐에서 지켜지고 있다. 이로써 Nordhoff와 폭스바겐 전 근로자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생산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5월에는 25,000번째 국민차가 만들어졌으며, 회사 사무실이 베를린에서 볼프스부르크로 옮겨진다. 이것은 오늘날의 폭스바겐으로 변천하는 또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2월 28일에는 폭스바겐의 보험 서비스(VVD – Volkwagen-Versicherungsdienst)가 개설되었다 비틀은 덴마크, 룩셈부르크, 스웨덴, 벨기에 및 스위스에서도 판매되기 시작한다. 총 생산량의 23%가 수출되었으며 외국통화로 2천백만마르크의 수익을 올렸다. 이 해에 모두 19,244대의 비틀이 생산되었다. 폭스바겐의 시장점유율은 63.5%가 되었고 독일 내의 모든 차중 64.4%가 폭스바겐이 되었다. 1949년에 공장 관리권은 연방정부로 넘어가고, 이들은 나중에 로우어 색소니(Lower Saxony)의 연방 주에 관리권을 행사하도록 위임하게 된다. 5월 13일, 볼프스부르크의 생산라인에서 50,000번째 국민차가 나왔고, 계속되는 증가 추세로 폭스바겐 금융사(Volkswagen Finanzierungsgesellschaft) 가 설립되었다. 4개 좌석의 VW 캐브리오레(VW Cabriolet)는 오스나브룩(Osanabruck)에 있는 카르만 사(Carmann Company)에서 차체를 만들어 생산되었다. 이 차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오래 생산된 컨버터블이 되었다. 오스나브룩 라인에서 1980년 1월 10일에 마지막으로 생산된 캐브리오레가 330,281번째 비틀 컨버터블이었다. 폭스바겐 공장의 연간 생산은 46,154대로 증가했고 9,497명의 근로자를 보유하게 되었다. 수출용 비틀은 새로운 색상과 도금, 그리고 더욱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선보여졌다. 그래서 비틀은 원래 있었던 군청색과 펄 그레이 외에 파스텔 그린, 미드브라운, 보르도레드, 그리고 검정색으로도 생산되기 시작한다. 독일에서 폭스바겐의 시장점유율은 49,3%, 독일차의 50%가 폭스바겐차가 되었으며 7개국에 수출되었다.

- 1950년

3월 4일, 공장은 100,000번째 국민차의 탄생을 축하했다. 엔진은 상당히 증진되었으며 수출용 모델은 수압(hydraulic) 브레이크가 장착되었다. 이제 폭스바겐은 세가지 모델 – 탑이 없는 컨버터블, 선루프가 장착된 탑, 혹은 완벽하게 닫힌 탑으로 선보여졌다. 보통 폭스바겐의 가격은 4,800마르크이었고 수출모델은 5,450마르크에 팔렸다. 

- 1951년

연간 생산량은 트럭 12,003대를 포함하여 105,712대에 달했다. 폭스바겐은 이제 29개국에 수출되는 세계적인 자동차가 되었다. 독일 연방 공화국에서는 729개의 지점에서 11,000명을 고용하게 되었다.

-1952년 

1952년의 주요 기술 혁신은 수출용 차량들과 캐브리오레에 들어 있는 싱크로메시 변속기(synchromesh gearbox)였다. 이 기술로 이중으로 클러치를 뺄 필요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기어를 보다 더 유연하고 조용하게 바꿀 수 있게 되었다. 

-1953년 

생산량은 꾸준히 증가해 독일차 중 42.5%가 폭스바겐이었으며 경상용차는 40.9%가 폭스바겐에서 생산한 차였다. 86개국으로 수출국도 늘어났으며 외국 통화로 2억5천4백2십만마르크의 수익을 창출했다. 7월 3일에는 500,000번째 자동차가 생산되었다. 

-1954년

VW 엔진의 출력이 30bhp로 향상되었다.

-1955년

 백 만대의 생산량을 달성하게 되었다.

- 1957년

 폭스바겐의 직원수는 거의 31,000명에 달하였다. 멜버른(Melbourne)에서는 폭스바겐이 51% 소유권을 갖고 폭스바겐 호주를 세웠다. 

- 1959년

 하노버에서도 엔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공랭식 및 최신 기술인 수냉식 폭스바겐 박서 엔진(air-cooled and water-cooled VW boxer engine)이 계속 이 곳에서 생산된다. 

- 1961년

 새로운 VW 1500에서는 9월부터 살롱(saloon)과 카르만 기아 쿠페로 생산에 들어갔다.

- 1965년

 VW 1600 TL이 첫 선을 보인 시기도 이 때였다. 2차 대전 이래 10억번째 폭스바겐이 탄생했다. 자회사였던 오토 유니온(Auto Union)에서 아우디(Audi)라는 새로운 모델을 개발했다.

-1967년

 안전에 대한 관심이 부각되었다. 모든 자동차가 새로운 safety steering column와 이중 브레이크(dual-circuit breaks)를 장착하였다. 최초로 비틀에 세미 오토매틱 변속기가 옵션으로 설치되었으며 VW1600에는 전자동 변속장치가 장착되었다. 

 -1968년

 Heinz Nordhoff 박사가 4월12일 향년 69세로 별세하였다. 1968년의 새로운 디자인은 VW411로 68bhp 엔진을 장착한 2도어/4도어 중형 세단이었다.

 -1969년

 잘츠기터(Salzgitter)공장 건설을 위한 대지를 구입하였다. 1970년부터 전면 휠드라이브와 수냉각 기능을 갖춘 NSU-developed K70이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1975년 이 모델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잘츠기터 공장은 211,127대를 생산하였다. 전지 급유 시스템이 VW411의 최대 출력을 80bhp까지 끌어올렸다. 1970년 모델로 다목적 VW181이 출시되었다. 이 모델은 대다수 연방군대의 수송차량으로 사용되었다. 8월 21일 Auto Union GmbH와 NSU Motorenwerke AG가 합병하여 아우디 NSU 오토 유니언 주식회사(Audi NSU Auto Union AG)가 설립되었다. 폭스바겐은 이듬해까지 이 회사의 지분을 99%로 끌어올렸다.

- 1972년

 2월 17일 15,007,034번째 비틀이 생산되어 1908년부터 1927년 사이에 생산되었던 전설의 포드 T모델을 누르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자동차로 기록되었다.

- 1973년

 폭스바겐 파사트가 출시되었다. 이는 차세대 최초의 신모델이었다. 파사트는 자동차가 보여줄 수 있는 기술적 혁신을 담았으며 개인들의 요구에 맞게 제작되었다. 파사트는 전륜 구동에 4기통 직렬 엔진과 단일 강철 몸체 등의 기능을 뽐냈다. 대형 후미개폐문(tailgate)이 있는 4도어형 파사트 배리언트(Passat Variant)가 가을에 출시되었다. 이 모델은 70년대초 폭스바겐이 보여준 혁신의 하나인 플라스틱 연료 탱크를 세계 최초로 장착하였다. 

- 1974년

볼프스부르크에서 비틀 생산은 11,916,519번째를 기하여 마감하였다. GOLF 출시함.

 -1985년

폭스바겐은 Volkswagenwerk AG에서 폭스바겐 주식회사(Volkswagen AG)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프랑크푸르트 모토쇼에서는 3가지 앞선 기술 혁신이 소개되었다. 

폴로 쿠페 G40의 G-charger, 출력을 향상시키는 최적화된 슈퍼 충전기(supercharger)

동력과 가속을 일으키고 콤팩트 라인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낸 16밸브 골프 엔진 

배기 가스 수준을 낮춘 최신 장치

9월1일 중국 파트너와 합작으로 상하이 폭스바겐 자동차 회사(Shanghai Volkswagen Automotive Company Ltd.)를 설립하였으며 이곳에서 VW 산타나를 생산을 시작하였다.

 -1986년

스페인의 세아트 인수하였다. 1,640,583대의 폭스바겐과 아우디를 유럽에 판매하며 유럽 최대의 자동차 생산업체가 되었다.

 - 1990년 

체코의 자동차회사인 스코다(Škoda)를 인수하였다.

 - 1991년

3월에 VR6엔진이 등장하면서 VW차종에 처음으로 6기통 엔진이 등장하게 되었고, 파사트에 장착되였다. 

  

3) 폭스바겐의 브랜드 전략

폭스바겐의 브랜드 전략은 거의 교과서에 가깝다. 폭스바겐은 비틀의 성공에 힘입어 1964년에는 아우디를 인수하고 1980년대에는 골프, 제타 모델이 잇따라 히트를 했고 동시에 세아트, 스코다 등의 유럽 자동차회사를 인수하게 되면서 유럽 최고의 자동차회사로 거듭나게 된다. 199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스포츠카인 람보르기니, 3대 명차로 꼽히는 벤틀리 등을 인수하여 고급 자동차 시장의 포트폴리오를 가지게 되었으며 2010년에는 폭스바겐 탄생의 1등 공신이었던 포르쉐 자동차 회사까지 합병하여 세계 자동차 기업에 합류한다. 폭스바겐의 성공요인은 그룹 내 다양한 브랜드들이 보유하여 다양한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여 경영 위기를 최소화 하였다. . 이는 이후 2010년 세계 자동차 시장의 위기에도 오히려 주문이 너무 많아서 3교대로 일을 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폭스바겐 그룹의 멀티브랜드 전략은 브랜드별 상호 보완으로 고객 만족 및 경영 안정을 추구하였다.

한편으로는 브랜드별 분리된 세일즈ㆍ마케팅 전략은 각 브랜드만의 특색을 강화시켜주는 한편으로 공동으로 기술을 개발하여 공유하거나, 생산설비와 원자재 등을 그룹 차원에서 시행해 비용을 아끼고 효과는 극대화한다. 이는 기업 차원에서 시장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고 꾸준하게 연구개발과 투자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해주어 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린다. 폭스바겐 그룹은 매년 매출의 5% 이상은 반드시 기술연구개발에 투자하는 ‘5% 룰’을 철저하게 준수하는데 이는 1980년부터 꾸준히 이어져왔다. 폭스바겐 보유 브랜드는 현재 폭스바겐 그룹(Volkswagen AG)은 벤틀리, 부가티, 람보르기니, 세아트, 스코다, 아우디 등이 있다.


*참고 자료 1. 한국 폭스바겐 홈페이지

           2.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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